티스토리 뷰
목차
보름밤마다 빈방에서 옷을 벗던 과부, 담장을 넘은 머슴이 발견한 황금 열쇠 《청구야담》의 과부 재가담·비밀 재물담을 결합한 각색
태그
#전설의고향, #오디오드라마, #청구야담, #과부재가담, #비밀재물, #금기된사랑, #조선시대로맨스, #머슴과마님, #사이다결말, #황금열쇠, #숨겨진재산, #시댁의음모, #수절과부, #객주, #시대극
#전설의고향 #오디오드라마 #청구야담 #과부재가담 #비밀재물 #금기된사랑 #조선시대로맨스 #머슴과마님 #사이다결말 #황금열쇠 #숨겨진재산 #시댁의음모 #수절과부 #객주 #시대극


후킹멘트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홀로 옷고름을 푸는 젊은 과부. 그녀의 은밀한 비밀을 훔쳐보려 담장을 넘은 머슴은 뜻밖에도 번쩍이는 황금 열쇠를 발견하게 되는데… 탐욕스러운 시댁의 음모에 맞서 쟁취한 금기된 사랑과 짜릿한 반전의 복수극! 지금 시작합니다.
씬1: 보름밤의 비밀 의식과 옥죄어오는 시댁의 탐욕
스산하고 차가운 밤바람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창호지를 때리던 깊은 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푸른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올라 거대한 기와집 위를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선 팔도에서 내로라하는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명문 거상의 고래등같은 대저택이었으나, 그 높고 두꺼운 담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기는 마치 수백 년은 고여 썩어 들어간 우물물처럼 탁하고 숨 막히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늘 하나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천둥번개처럼 온 집안을 쩌렁쩌렁 울릴 것만 같은 무겁고 기괴한 적막 속에서, 안채 가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조심스럽고도 다급한 여인의 잰걸음 소리가 사뿐히 복도의 나무 널빤지를 울리며 새어 나왔다. 열아홉이라는 꽃처럼 어여쁜 나이에 이 거대한 상단의 안주인으로 시집와, 미처 피어나기도 전인 스물하나의 나이에 하늘 같던 남편을 허망한 병마로 잃고 홀로 남아 청상과부가 된 가련한 여인. 달빛에 비친 여인의 창백한 얼굴에는 짙은 수심과 함께, 언제 누구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과 알 수 없는 서늘한 긴장감이 기분 나쁘게 서려 있었다.
어둠이 무겁게 깔린 복도를 지나 숨죽여 걷던 여인이 마침내 걸음을 멈춰 선 곳은, 생전 남편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며 온갖 장부와 서적들을 쌓아두고 머물렀던 별당 앞이었다. 굳게 닫힌 문고리를 부여잡은 여인의 가늘고 하얀 손끝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려왔다. 불과 일 년 전, 건장하고 호탕했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이름 모를 몹쓸 병에 걸려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난 후로 이 방은 마치 무덤처럼 버려져 있었다. 아직도 문을 열면 남편이 쓰던 묵향과 짙은 체취가 아스라이 배어 나와 가슴을 후벼 팔 것만 같은 그곳. 여인은 혹여나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지 않았는지 주위를 한 번 더 불안한 눈빛으로 샅샅이 살핀 뒤, 삐걱거리는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별당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달빛만이 찢어진 창호지 틈 사이로 새어 들어와 유일한 조명 역할을 해주고 있는 텅 빈 방 안은,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하고 소름 끼치는 냉기만이 짙게 감돌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이 방에 들어왔어. 다들 깊이 잠든 것 같아 다행이지만… 대체 언제까지 그 끔찍한 자들의 번뜩이는 눈을 피해 매일 밤 이 짓을 계속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굵은 빗장까지 단단히 지른 여인은, 그제야 밤새 가슴속에 꽉 막혀 있던 숨을 길게 토해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애처로운 시선이 방 안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옻칠이 벗겨진 낡은 반닫이를 향했다. 남편이 살아생전 그 무엇보다 몹시도 아끼고 애지중지하며 누구의 손도 닿지 못하게 하던 물건이었다. 여인은 홀린 듯이 천천히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더니, 겹겹이 자신의 몸을 무겁게 옥죄고 있던 거칠고 하얀 소복의 빳빳한 옷고름으로 조심스레 두 손을 가져갔다.
사르륵, 차가운 비단이 피부에서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겁고 답답했던 삼베 상복이 바닥으로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얇은 속적삼 하나만 아슬아슬하게 걸친 가녀린 어깨와 옥처럼 하얀 목덜미가 창백한 달빛을 고스란히 받아 눈이 시리도록 처연하게 빛났다. 그것은 결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거나 은밀한 교태를 부리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남편이 죽고 난 뒤 장례를 치르며 시작된 3년 상,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탐욕스러운 시댁 식구들이 억지로 강요하는 '열녀'라는 끔찍하고 잔인한 굴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무겁고 거친 그 상복을 벗어 던져야만 비로소 온전히 살아 숨 쉬는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여인만의 처절하고도 슬픈 비밀스러운 의식이었던 것이다.
"형수님, 우리 가문의 드높은 명예와 칭송은 오직 형수님의 굳건하고 변함없는 수절에 달려 있습니다. 부디 사사로운 여인의 감정은 철저히 버리시고, 오직 땅에 묻힌 죽은 형님만을 위해 평생토록 뼈를 깎는 고통으로 몸을 바치셔야지요."
오늘 낮에도 어김없이 안채로 찾아와 뱀이 똬리를 틀듯 소름 끼치게 귓가를 맴돌던 시숙의 그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떠올라 여인은 몸서리를 쳤다. 죽은 남편의 배다른 동생인 시숙은 남편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추악한 본색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겉으로는 가문의 명예와 조정에서 내리는 열녀문을 핑계 삼아 여인을 안채의 좁은 방에 가두다시피 감시하면서, 속으로는 남편이 생전에 이룩해 놓은 조선 팔도의 막대한 재산과 상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객주의 절대적인 권리장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남편은 죽기 전, 피를 토하며 숨이 넘어가는 그 끔찍한 와중에도 여인의 두 손을 부서져라 꼭 쥐며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유언처럼 남겼었다.
'절대로… 그 탐욕스러운 짐승들에게 상단을 내어주어선 안 되오. 보름달이 둥글게 뜨는 밤… 내 서재의….'
끝내 문장을 다 맺지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허망하게 눈을 감아버린 남편. 여인은 남편이 숨을 거둔 그 비극적인 날 이후로, 매달 보름달이 뜨는 밤이 찾아올 때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남편의 빈방에 숨어들어 필사적으로 단서를 찾아 헤맸다. 시숙이 이미 수십 번도 넘게 남편의 모든 문서를 샅샅이 뒤집어엎고, 심지어 방바닥의 두꺼운 장판과 벽지까지 모조리 뜯어내며 혈안이 되어 찾던 그 '진짜 재산과 장부'의 행방을 알아내야만 했다. 만약 자신이 먼저 그것을 찾지 못한다면, 평생 시댁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상단의 재산만 빼앗긴 채 결국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마저 빼앗길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기 때문이다.
여인은 차디찬 방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남편의 낡은 옷가지들과 서책들을 하나하나 더듬기 시작했다. 두꺼운 겨울 솜두루마기의 솔기를 뜯어질 듯 꾹꾹 매만지고, 먼지가 소복이 쌓인 서안 밑바닥의 틈새를 훑는 그녀의 손길은 절박함을 넘어 애처롭기까지 했다. 뽀얀 먼지가 매캐하게 날리고 가녀린 손톱 밑이 새까맣게 멍이 들도록 방 안의 모든 구석을 뒤졌지만, 야속하게도 오늘 밤 역시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서방님… 대체 어디에 그 중요한 것들을 숨겨두신 겁니까. 저들이 점점 제 목을 비틀며 숨통을 조여옵니다. 제발, 제발 제게 살아갈 길을 알려주세요….'
기어이 참았던 눈시울이 붉어지며 뜨거운 눈물이 하얀 뺨을 타고 툭툭 흘러내렸다. 차가운 달빛에 비친 여인의 가냘픈 그림자가 낡은 벽 위에서 외롭고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밤벌레 우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가득한 텅 빈 방 안에서, 억압의 상복을 훌렁 벗어 던진 채 죽은 남편의 흔적을 미친 듯이 좇는 젊은 청상과부의 애처로운 숨소리만이 깊어가는 밤공기를 더욱 차갑고 시리게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찾는데 정신이 팔린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찢어진 창호지 구멍 틈 사이로, 짐승처럼 타는 듯한 짙고 뜨거운 시선 하나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자신을 꼼짝없이 지켜보고 있다는 끔찍하고도 아찔한 사실을 말이다.
씬2: 담장을 넘은 머슴, 빈방에서 드러난 황금 열쇠의 단서
화려한 거대 저택의 외곽, 찬 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치는 낡고 허름한 행랑채의 비좁은 방 안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거친 몸을 뒤척이던 사내가 있었다. 일반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훌쩍 큰 떡 벌어진 넓은 어깨와, 수십 년간 험한 농사일과 짐꾼 노릇으로 굵게 마디가 진 투박한 손을 가진 젊은 머슴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 삭막한 집안에 팔려 와 온갖 궂은일과 험한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늘 자신의 그림자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존재감 없이 지내는 과묵한 사내였다. 남들은 덩치만 크고 미련한 놈이라며 그를 우직하고 말 없는 짐승 취급을 했지만, 그의 깊은 가슴 속에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하늘에게조차 들켜서는 안 될 펄펄 끓는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꽁꽁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달빛처럼 처연하고 눈이 멀 만큼 아름다운 자신의 가련한 안주인에 대한 지독하고도 금기시된 연모의 정이었다.
사내는 유독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오늘 밤에도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얇은 홑적삼 하나만 걸친 채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해가 질 무렵, 안채의 뒤뜰을 맴돌며 수상한 짓거리를 하던 시숙의 하수인들이 은밀하게 나누던 끔찍한 대화가 귓가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밤이 딱 보름달이 차오르는 날이니, 필시 그 독한 과부년이 또 남편의 별당으로 몰래 숨어들어 발악을 할 것이다. 시숙 나리께서 단단히 일러두시길, 분명 눈을 감은 형님이 그 방 어딘가에 객주의 장부와 권리장전이 든 금고 열쇠를 숨겼을 것이니, 그년이 그것을 찾아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숨죽이고 기회를 봐서 덮쳐야 한다고 하셨다. 만약 그년이 열쇠를 찾으면 뺏어서 목을 비틀고,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외간 남자와 놀아난 화냥년으로 만들어 쫓아낼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
그 흉악하고 소름 끼치는 모의를 우연히 엿들은 사내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마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위험이 닥쳐오고 있었다. 사내는 그 누구에게도 알릴 새도 없이, 앞뒤 잴 것 없이 망설임 없이 별당 뒤편의 가장 높고 가파른 담장으로 향했다. 발을 헛디디면 목이 부러질 만큼 거친 돌담을 맨손으로 억세게 부여잡고 짐승처럼 날렵하게 담을 뛰어넘은 그는, 별당의 뒤뜰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 더미 속에 숨을 죽이고 바짝 엎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을 깨고 별당의 낡은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불안한 표정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사내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거친 두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희미하게 달빛이 새어 나오는 창호지 구멍으로 조심스레 한쪽 눈을 가져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내는 숨을 헉 하고 들이켜며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창호지 너머로 사내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사내의 비루한 평생에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고 감히 훔쳐봐서도 안 될 아찔한 것이었다. 무겁고 칙칙했던 소복을 훌렁 벗어 던진 여인이, 속살이 훤히 비칠 만큼 얇디얇은 속적삼 차림으로 방 안을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달빛에 투영된 너무도 가녀린 실루엣과, 옥처럼 하얀 목덜미에서 이어지는 어깨선이 사내의 이성을 하얗게 마비시켰다.
'마님… 아아, 나의 불쌍하고 고운 마님….'
하지만 그 찰나의 아찔한 황홀함도 잠시, 사내의 눈빛은 이내 날카로운 매처럼 변했다. 여인의 행동이 몹시도 기이하고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옷을 반쯤 벗은 채로 방 안의 물건들을 미친 듯이 파헤치고 뜯어내고 있었다. 남편의 낡은 옷을 뒤집어 까고, 서랍장의 좁은 틈새를 살피고, 방바닥을 두드리는 그녀의 떨리는 손끝에서는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짙은 절박함과 극한의 두려움이 처절하게 배어 나왔다. 사내는 단번에 직감했다. 마님은 지금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시숙 일당이 피눈물을 흘리며 온 집안을 뒤집어엎으면서도 찾지 못했던 그 '엄청난 물건'을 말이다.
여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남편의 유품인 두껍고 무거운 겨울 솜두루마기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두루마기의 안쪽 옷깃을 유심히 살피며 천을 비벼보던 여인의 손이 어느 한 곳에서 거짓말처럼 우뚝 멈칫했다. 다른 곳의 박음질과는 다르게 덧대어진 뒷목 부분의 실밥이 미세하게 튀어나와 엉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여인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머리에 단정하게 꽂고 있던 날카로운 은비녀를 빼어 들었다. 은비녀의 뾰족한 끝으로 조심스럽고도 다급하게 솜두루마기의 두꺼운 실밥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투둑, 투둑.
두꺼운 명주실이 힘겹게 끊어지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팽팽하게 울렸다. 마침내 겹겹이 꿰매어진 옷깃의 솔기가 벌어지고, 하얗게 뭉친 솜 사이로 무언가 묵직하고 단단한 것이 스르르 밀려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건…!"
여인의 입에서 억눌린 탄성과도 같은 옅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차가운 달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번쩍이는 그것.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아주 정교하고 묵직한 '황금 열쇠'였다. 여인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아, 이내 그 황금 열쇠를 꽉 쥐고 가슴 깊이 품었다. 죽은 남편이 그토록 꽁꽁 숨겨두었던 마지막 희망이자, 이 숨 막히는 지옥 같은 시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동아줄을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창밖에서 숨을 죽인 채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사내 역시 놀라움에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작고 반짝이는 황금 열쇠야말로 시숙이 온 집안 사람들을 들쑤시고 다니며 미친개처럼 찾던 객주의 비밀 금고 열쇠가 분명했다. 사내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긴장을 풀고 몸을 뒤로 물리려던 찰나였다.
우지끈!
긴장으로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사내의 발이 그만 뒤뜰의 바짝 마른 썩은 나뭇가지를 무참히 밟고 말았다. 칠흑같이 고요한 밤의 정적을 날카로운 비명처럼 깨부수는 끔찍한 파열음. 방 안에서 황금 열쇠를 소중히 품고 안도하던 여인의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움찔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고 굳어졌다. 사내는 등줄기를 타고 폭포수처럼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 별당 근처의 어둠 속에 완벽하게 매복해 있던 시숙의 독사 같은 하수인들이 그 커다란 소리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저기다! 저기 별당 뒤뜰에 쥐새끼 같은 놈이 숨어 있다! 놈이 담을 넘지 못하게 당장 잡아들여라!"
사방에서 붉은 횃불이 무더기로 켜지고, 날카롭고 살기 어린 고함 소리가 별당의 고요한 뒤뜰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몽둥이를 든 사내들이 떼거지로 몰려오고 있었다. 사내는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의 뛰어난 몸놀림이라면 혼자서 어둠을 타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만약 자신이 쥐새끼처럼 여기서 도망쳐버리면 방 안에 혼자 남겨진 여인이 옷을 반쯤 벗고 있는 상태로 모든 끔찍한 의심과 멸시, 그리고 시숙의 악랄한 화를 홀로 다 뒤집어쓸 것이 너무나 뻔했다. 사내는 달아나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횃불을 든 무리들을 향해 스스로 몸을 돌렸다. 오직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마님을 지키겠다는 처절한 결단이었다.
씬3: 도둑으로 몰린 머슴과 덫을 놓는 시숙
순식간에 칠흑 같던 안채의 널찍한 마당이 대낮보다 더 환하게 밝아졌다. 사방을 에워싼 수십 개의 붉은 횃불이 매서운 바람에 미친 듯이 일렁이는 가운데, 요란한 소리에 놀라 바닥에 떨어졌던 상복을 허겁지겁 다시 꿰어 입은 여인이 창백하게 질린 유령 같은 얼굴로 하수인들의 손에 이끌려 마당 한가운데로 무참히 끌려 나와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동자는 오직 마당 한구석, 굵은 동아줄로 짐승처럼 꽁꽁 묶인 채 거친 흙바닥에 무릎이 꿇린 덩치 큰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 얼굴이 퉁퉁 터져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거칠게 숨을 헐떡이면서도, 사내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을 향해 행여나 불똥이 튈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차가운 바닥만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 천하의 발칙하고 버러지만도 못한 놈! 네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밤중에 상중에 있는 안주인의 별당을 기웃거린단 말이냐! 당장 다리를 분질러 놓아라!"
최고급 비단 가죽 구두의 차갑고 도도한 발소리와 함께 시숙이 등불을 든 노비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번들거리는 뱀 같은 얼굴에는 분노를 애써 가장하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자신의 덫에 걸려든 사냥감을 보는 교활한 미소가 비릿하게 걸려 있었다. 시숙은 성큼성큼 다가가 묶여 있는 사내의 턱을 거칠게 발로 걷어찼다.
"퍽!" 하는 뼈가 부딪히는 둔탁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흙바닥으로 짐승처럼 뒹굴었다. 하지만 사내는 입안에 고인 피를 퉤 하고 뱉어낼 뿐,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다시 독기 어린 부리부리한 눈으로 꿋꿋하게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어디 혀를 뽑히기 전에 바른대로 말해보거라. 근본도 없는 천한 머슴 놈이 야심한 밤에 홀로 되신 형수님의 처소는 대체 왜 훔쳐보았느냐? 혹여… 과부 혼자 지내는 방에 딴마음을 품고 담장을 넘어 몹쓸 짓을 벌이려 한 것은 아니더냐? 아니면… 안에서 문을 열어준 자가 있었던 게냐!"
시숙의 목소리가 음흉하고도 날카롭게 허공을 갈라 여인의 귓가를 뱀처럼 감고 돌았다. 그것은 단순히 무엄한 머슴을 추궁하기 위한 억박지름이 아니었다. 이 힘없는 머슴을 철저히 이용해, 남편의 3년 상을 치르고 있는 여인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불륜의 오명을 씌우려는 악랄하고도 치밀한 덫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평소에도 밤잠이 없어 이리저리 마실을 다니던 아이온데, 그저 오늘따라 길을 잃고 헤맨 것일 뿐…."
여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필사적으로 사내를 변호하려 했지만, 시숙은 싸늘한 비웃음을 흘리며 여인의 말을 칼로 베듯 차갑게 끊어냈다.
"형수님, 가문의 체통과 형님의 드높은 명예를 생각하시어 지금 당장 입을 굳게 다무시지요. 한밤중에 과부가 옷을 훌렁 벗고 외간 남자를 별당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였다는 이 더럽고 추잡한 소문이 행여 우리 대문 밖으로 새어 나가 동네방네 퍼지기라도 한다면, 형수님은 내일 아침이 밝기 전에 스스로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피를 흘리며 자결하셔야 할 겝니다."
여인의 심장이 천 길 낭떠러지로 철렁 내려앉았다. 시숙은 이미 눈치를 채고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방 안에서 거추장스러운 상복을 벗고 남편의 물건을 뒤지고 있었다는 그 은밀한 사실마저도. 시숙의 하수인들이 사내를 잡기 위해 뒤뜰로 들이닥쳤을 때, 문구멍이나 찢어진 창호지 틈으로 방 안의 정황을 똑똑히 엿본 것이 틀림없었다.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저 악마 같은 자가 파놓은 거대한 함정이었구나.'
시숙이 비릿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여인에게 다가와 등골이 오싹해지는 목소리로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형수님께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하나 알려드리지요. 오늘 밤 그 방에서 찾은 것… 죽은 형님이 꽁꽁 숨겨둔 객주의 장부와 권리장전이 들어있는 금고 열쇠가 어디 있는지 당장 내게 넘기십시오. 그리하면 이 발칙하고 미련한 놈의 목숨도 자비롭게 살려주고, 형수님이 한밤중에 춘정을 이기지 못해 천한 머슴 놈을 별당으로 끌어들였다는 그 불미스럽고 더러운 일도 내 무덤까지 완벽하게 덮어드리리다. 하지만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모른 척하신다면… 내일 아침 해가 뜨는 즉시, 이 놈은 주인의 물건을 노린 도둑질에 안주인을 겁탈하려 한 미수죄로 관아에 넘겨져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고, 형수님은 명문 가문의 이름을 똥칠한 더러운 화냥년으로 낙인찍혀 소박을 맞고 거리에 나앉게 될 것입니다."
뼛속까지 시려오는 소름 끼치는 협박. 여인은 소맷자락 안 깊숙한 곳에 숨겨둔 묵직하고 차가운 황금 열쇠를 움켜쥔 두 손에 붉은 피가 배어 나오도록 힘을 꽉 주었다. 당장이라도 이까짓 열쇠를 시숙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제발 이 가엾고 충직한 사내의 목숨만은 살려달라 바닥에 엎드려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상단을 지켜달라며 피눈물을 흘리던 남편의 핏발 선 두 눈동자가 어른거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 열쇠를 넘기는 순간, 시숙은 가문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자신마저 흔적 없이 죽여버릴 것이 분명했다.
"저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도련님께서 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인의 단호하고도 얼음장 같은 대답에 여유롭던 시숙의 얼굴이 일순간 야차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지독하고 표독스러운 년. 그래, 어디 언제까지 그 알량한 자존심으로 버티나 보자. 여봐라! 저 근본 없는 놈을 당장 캄캄한 뒷간 옆 광에 가두고 뼈와 살이 완전히 분리되어 고깃덩어리가 될 때까지 가차 없이 매질을 하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관아의 사또에게 끌고 가 개 끌듯 쳐죽일 것이다!"
건장한 사내 서넛이 짐승처럼 달려들어 이미 피투성이가 된 사내를 질질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바닥에 끌려가 핏자국을 남기는 그 비참한 와중에도, 사내는 단 한 번 아주 짧은 찰나 여인을 향해 묵직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투박하고 찢겨 상처 입은 얼굴 속에 담긴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고도 깊은 연모의 눈빛. 그것은 원망이나 분노가 아니라, 마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모든 짐을 다 안고 조용히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처절한 묵언의 위로였다.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눈빛이 여인의 차갑게 얼어붙은 가슴 한구석에 뜨겁고도 거대한 불씨를 툭 떨어뜨렸다.
횃불이 모두 꺼지고 텅 빈 마당에 홀로 내팽개쳐진 여인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소리 없이 오열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편의 유지를 억척스럽게 지키기 위해 그토록 착하고 죄 없는 사내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지독한 죄책감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하지만 그 애끓는 눈물은 이내 차갑고 서늘하게 식어갔다. 여인은 진흙투성이가 된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천천히, 그리고 아주 단단하게 몸을 일으켰다. 달빛 아래 핏기 없이 드러난 그녀의 눈동자에는 전과 같은 두려움이나 나약함 대신, 칼날보다 서늘한 독기와 세상을 다 불태워버릴 듯한 결연함이 시퍼렇게 서려 있었다.
'아니, 이대로 억울하게 당하지만은 않겠어. 그깟 양반 가문의 체면 따위, 열녀라는 허울 좋은 무덤 따위… 내가 내 손으로 다 산산조각 부숴버릴 테다.'
그녀의 꽉 쥔 손안에서 작고 차가운 황금 열쇠가 묵직하고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반격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씬4: 어둠 속의 밀회, 두 사람이 맞잡은 손과 반격의 시작
가장 짙은 어둠이 내리고 세상 만물이 죽은 듯이 고요해지는 축시, 뼛속까지 파고드는 눅눅하고 차가운 새벽안개가 거대한 저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시각이었다. 안채와 행랑채의 불이 모두 꺼지고 철통같이 감시하던 시숙의 하수인들마저 쏟아지는 졸음에 겨워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고 있을 즈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검은 치마를 뒤집어쓴 여인의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안채를 빠져나와 뒤뜰의 낡은 헛간으로 물귀신처럼 스며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짙은 피비린내와 퀴퀴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헛간 안쪽, 굵은 밧줄에 두 손이 천장에 매달린 채 기절해 있는 덩치 큰 사내의 처참한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드러났다.
"만복아… 만복아, 내 목소리 들리느냐? 정신 좀 차려보아라."
여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두 손으로 사내의 피떡이 된 뺨과 찢어진 입술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체온을 잃고 차갑게 식어가는 거친 피부의 감촉에 여인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여인의 간절하고도 애달픈 부름에 사내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며 눈을 떴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눈앞에 아른거리는 여인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본 사내는, 자신이 필시 지옥의 문턱에서 헛것을 보고 있거나 죽기 직전의 아름다운 환상을 본다고 생각했다.
"마… 마님…? 마님께서 정녕 이곳이 어디라고 겁도 없이 오셨습니까. 어서, 어서 안채로 돌아가십시오. 누군가 마님께서 여길 오신 걸 보기라도 하면… 정말로 끝장입니다."
사내가 갈라지고 피가 섞인 목소리로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당장 내일 아침이면 목이 달아날 상황에서도 오직 여인의 안위만을 먼저 걱정하는 그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고 바보 같은 충심에, 여인은 기어이 꾹꾹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미련하고 바보 같은 놈아. 네가 매일 밤 그림자처럼 내 처소 밖에서 서성대며 나를 지켜주었던 그 기척을 내가 정말 몰랐을 것 같으냐? 내가 위험해질까 봐 스스로 도둑놈의 누명을 쓰고 이 모진 매를 다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말이다."
여인의 떨리는 말에 사내의 굵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거칠게 흔들렸다.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감춰두었던, 감히 쳐다봐서도 안 될 여주인에 대한 맹목적인 연모가 들통났다는 수치심과 당혹감이 피 묻고 퉁퉁 부은 얼굴 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죽여주시옵소서… 천하고 짐승만도 못한 놈이 감히 하늘 같으신 마님을 마음에 품어… 그 불경한 죄, 백 번 천 번 죽어 마땅합니다. 제발 저를 죽이고 마님은 모른 척하십시오."
사내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이자, 여인은 품속 깊이 숨겨왔던 번뜩이는 날카로운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사내는 그녀가 자신의 더러운 목숨을 직접 거두어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고 생각하고 미련 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서늘한 칼날이 닿은 곳은 그의 두꺼운 목덜미가 아니라, 그의 두 손목을 잔인하게 옭아매고 천장에 매달아 둔 질기고 굵은 밧줄이었다.
스걱, 스걱.
질기고 억센 밧줄이 칼날에 끊어지는 소리가 나고 사내의 거대한 몸이 바닥으로 쿵 하고 무너지려 하자, 여인이 재빨리 다가가 그를 온 힘을 다해 부축해 안았다. 사내의 크고 뜨거운 몸이 여인의 가녀린 품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피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여인의 은은한 분 향기가 뒤섞이며 두 사람의 뜨거운 숨결이 어둠 속에서 위험하고도 아찔하게 교차했다. 평생을 갈라놓았던 신분이라는 철옹성 같던 장벽과 금기라는 무서운 족쇄가, 이 비좁고 남루한 헛간 안에서만큼은 흔적도 없이 봄눈 녹듯 덧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죽긴 왜 허망하게 죽는단 말이냐. 나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너를, 내가 어찌 한낱 양반의 알량한 체면 따위로 버릴 수 있겠느냐."
여인이 사내의 피투성이가 된 크고 거친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꽉 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치맛자락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사내의 넓은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짜릿한 촉감.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그것은 방 안에서 찾아냈던 바로 그 '황금 열쇠'였다.
"이 열쇠가 정확히 무엇을 여는 것인지, 서방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무엇을 꽁꽁 숨기려 하셨는지 나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시숙 그 악마 같은 자는 이것이 객주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리장전과 억만금의 재물을 찾을 유일한 열쇠라 굳게 믿고 있지. 나는 기필코 그 숨겨진 재물을 찾아내 이 지옥 같은 집구석을 영원히 떠날 것이다."
여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나약하게 수절을 강요받으며 숨죽여 울던 슬프고 가련한 과부의 모습은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안에는 복수와 생존을 향한 무서운 집념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가문의 개처럼 묶여 뼈가 부서지도록 일만 하다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쓰고 죽을 바엔, 차라리 나와 함께 이 열쇠의 비밀을 풀고 저들의 추악한 민낯을 온 천하에 까발리고 도망치지 않겠느냐."
여인의 도발적이고도 절박하며 미치도록 달콤한 제안. 그것은 평생을 땅만 쳐다보고 살며 주인에 대한 순종만을 유일한 미덕으로 여겼던 사내의 가슴 깊은 곳에 꽁꽁 억눌려 있던 맹수의 본능을 무참히 일깨웠다. 사내는 자신을 향해 기꺼이 뻗어온 여인의 작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손을 부서져라 꽉 마주 잡았다.
"마님께서 굳게 마음먹고 가시는 길이라면, 그곳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이든 끝을 알 수 없는 지옥 구덩이든 제가 제일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마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물어뜯는 사냥개가 되겠습니다."
사내의 피 끓는 맹세가 헛간의 무거운 어둠을 가르고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얽힌 손 사이로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온기가 폭발하듯 교류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여주인과 천한 머슴의 목숨을 건 결탁이 아니었다. 세상의 억압받는 두 영혼이 생사를 걸고 맺은 처절하고도 성스러운 맹약이자, 죽음의 문턱에서 가장 붉게 피어난 짙고 위험한 연정의 강렬한 시작이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 날이 밝고 동이 트기 전에 서방님이 생전에 가장 아끼시고 은밀하게 드나들던 장소를 빨리 찾아야 해. 이 황금 열쇠가 딱 들어맞는 숨겨진 거대한 금고가 분명 이 저택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여인의 다급한 말에 사내가 번뜩 무언가 스쳐 지나간 듯 고개를 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깨달음의 빛이 서렸다.
"가만… 나리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며 돌아가시기 불과 며칠 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깊은 밤 홀로 커다란 삽을 들고 아무도 가지 않는 뒤뜰의 낡은 폐우물 쪽으로 가시는 것을 제가 우연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저 빗길을 내러 가시는 줄로만 알았사온데…."
여인과 사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이 튀듯 강렬하게 부딪혔다. 우물. 오랫동안 물이 바짝 말라버려 집안사람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뒤뜰 구석의 음산한 폐우물. 흩어져 있던 모든 조각이 하나의 완벽한 그림으로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바닥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시댁을 향한 짜릿한 복수를 위한, 그리고 진정한 자신들의 사랑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숨 막히는 반격의 서막이 차갑고 축축한 새벽안개 속에서 아주 조용하고도 거대하게 닻을 올리고 있었다.
씬5: 남편의 유서와 숨겨진 금고를 찾아 나선 밤
뼈를 에이는 듯한 매서운 찬 바람이 잦아들고,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희뿌연 새벽안개가 거대한 저택의 기와지붕 위로 짙게 내려앉은 시각. 저택의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뒤뜰은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기괴하고 끔찍한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 밟는 소리조차도 마치 천둥번개처럼 온몸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들 만큼 팽팽하고 숨 막히는 긴장감이 여인과 사내의 주변을 무겁게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이 숨죽여 도착한 폐우물은 뒤뜰 가장 깊숙한 곳,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어른 허리춤까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구석에 음산하고 시커먼 입구를 흉측하게 벌리고 있었다. 여인은 혹여나 누군가 뒤를 밟지 않았는지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매섭게 살피며 조심스럽게 우물가로 다가갔다. 오랫동안 물이 바짝 말라붙어 버려진 우물 안에서는 서늘하고 비릿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죽음의 냉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마님, 제가 먼저 저 아래로 내려가 바닥을 샅샅이 살펴보겠습니다. 마님께서는 위에서 주변의 망을 보시며, 이 밧줄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고 계시옵소서."
온몸이 채찍에 찢기고 터져 성한 곳 하나 없는 상처투성이인 사내가, 헛간에서 챙겨 온 굵은 동아줄을 우물가 옆에 버티고 선 거대한 고목나무 밑동에 부서져라 단단히 묶으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까지 헛간의 차가운 천장에 매달려 사경을 헤매며 피를 토하던 몸이었지만, 오직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련한 여인을 지켜내겠다는 그 처절한 일념 하나로, 사내는 상처의 고통조차 잊은 채 짐승처럼 펄떡이는 뜨거운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인은 안타까움과 두려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애틋함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젖은 눈빛으로 사내의 상처 나고 투박한 손을 꽉 쥐었다.
"조심해야 한다, 만복아.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거나 인기척이 느껴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당장 위로 올라와야 한다. 알겠느냐?"
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굵은 밧줄에 자신의 거대한 몸을 의지한 채 깊고 어두운 우물의 시커먼 아가리 속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사르륵, 사르륵. 거친 밧줄이 고목나무 기둥을 쓸며 풀려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듬직한 모습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삼켜졌다. 홀로 지상에 남겨진 여인은 자신의 거친 숨소리조차 죽인 채 우물 안을 굽어보며 두 손을 간절하게 모아 기도했다. 제발, 억울하게 눈을 감은 서방님이 남기신 마지막 희망이 저 어둡고 차가운 바닥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를. 이 지독하고 끔찍한 시댁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되어 주기를.
우물 바닥에 무사히 발이 닿은 사내는, 품속에서 미리 챙겨 온 작은 부싯돌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불을 밝혔다.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빛이 둥글고 좁은 우물 안쪽의 습기 찬 벽면을 아슬아슬하게 비추었다. 시퍼런 이끼가 잔뜩 낀 축축하고 차가운 돌벽을 찬찬히, 그리고 아주 세밀하게 더듬어 내려가던 사내의 거친 손끝에 문득 미세하고도 기묘한 위화감이 감지되었다. 우물을 구성하고 있는 다른 돌들과 달리 유독 한가운데 박혀 있는 커다란 돌덩이 하나만이 이끼가 거의 끼어 있지 않았고, 주변의 진흙도 최근에 누군가 파낸 것처럼 미세하게 틈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심호흡을 깊게 한 뒤, 그 비좁은 틈새로 피가 흐르는 두 손가락을 억지로 밀어 넣어 뼈가 으스러질 듯한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무거운 돌덩이를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마님! 찾았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우물 밖을 향해 들려온 사내의 억눌린, 그러나 터질 듯이 벅찬 외침에 여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밧줄을 타고 다시 지상으로 짐승처럼 기어 올라왔을 때, 그의 커다란 품에는 흙투성이가 된 묵직하고 단단한 쇠장식이 박힌 낡은 철제 상자 하나가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두 사람은 날이 밝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떨리는 숨을 헐떡인 채 헛간 안으로 다시 황급히 몸을 숨겼다. 여인은 소맷자락 가장 깊은 곳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품고 있던 차갑고도 영롱한 황금 열쇠를 꺼내어, 진흙이 묻은 철제 상자의 정교한 자물쇠 구멍 속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철컥.
무겁고 둔탁한 금속음이 헛간의 정적을 깨며 울려 퍼짐과 동시에,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잠들어 있던 철제 상자의 무거운 뚜껑이 마침내 그 입을 열었다. 뽀얀 먼지를 털어내고 안을 들여다본 두 사람의 눈앞에는, 두툼하게 묶인 장부 서너 권과 최고급 비단으로 고이 싸인 두루마리 문서들, 그리고 붉은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된 낡은 서신 한 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가장 위에 놓인 장부를 펼쳐 든 여인의 두 눈동자가 순식간에 경악으로 커지며 파르르 떨려왔다. 그것은 시숙이 그토록 피눈물을 흘리며 미친개처럼 온 집안을 뒤져 찾아 헤매던, 조선 팔도의 모든 상단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장전과 상단의 진짜 재산 내역이 낱낱이 기록된 비밀 장부였다. 하지만 여인을 더욱 경악하게 만든 충격적인 사실은, 그 장부들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시숙의 더럽고 추악한 치부책이었다. 시숙이 지난 몇 년간 남편 몰래 상단의 막대한 재물을 뒤로 빼돌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관아의 사또는 물론 관찰사에게까지 막대한 뇌물을 바치며 뒷배를 봐달라고 청탁한 끔찍한 기록들이 날짜와 금액까지 고스란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두 손으로 붉은 밀랍이 발라진 봉인된 서신을 뜯어내었다. 겉면에는 죽은 남편의 힘없고 떨리는,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필체가 처절하게 적혀 있었다.
'나의 가엾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네가 어두운 우물 속에서 이 편지를 찾아내어 읽고 있을 즈음이면, 나는 아마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나의 어리석고 탐욕에 눈이 먼 아우가, 내가 매일 밤 마시는 탕약에 아주 조금씩, 쥐도 새도 모르게 독을 타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알았을 때, 나의 몸은 이미 독이 오장육부에 퍼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린 후였다. 가문의 씻을 수 없는 수치를 덮으려 내 한 목숨 억울하게 조용히 끊어지기만을 기다렸으나, 짐승만도 못한 내 아우의 그 무서운 탐욕은 내가 죽는다고 해서 결코 멈추지 않고, 결국 홀로 남겨진 너의 가녀린 숨통마저 무참히 조여갈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 차가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상단의 권리장전과 뇌물 장부는, 내 아우의 짐승 같은 추악한 죄상을 온 세상에 밝히고, 네가 이 지옥에서 온전한 자유를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무기다. 부디 이것으로 시댁이라는 끔찍하고 잔인한 굴레를 가차 없이 끊어내고, 네 몫의 막대한 재산을 찾아 이 지긋지긋한 곳을 멀리 떠나 다오. 평생 과부의 수절이라는 저주 같은 감옥 속에 너의 아름다운 청춘을 가두지 말고, 부디 널 진정으로 아껴주고 목숨 바쳐 지켜줄 수 있는 사내를 만나, 새처럼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라. 그것이 살아서 너를 온전히 지켜주지 못한, 무능하고 못난 지아비의 피맺힌 마지막 소원이다.'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 내려가던 여인의 두 눈에서 뜨거운 피눈물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종이를 흠뻑 적셨다. 남편은 하늘이 무심하여 병사한 것이 아니었다. 시숙의 그 간악하고 악마 같은 독살에 의해, 밤마다 피를 토하며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가는 그 끔찍한 공포의 순간에도, 오직 홀로 남겨져 핍박받을 어린 아내의 앞날만을 걱정하며 자신의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쥐어짜 이 모든 치밀한 안배를 해두었던 것이다. 여인은 남편의 피 묻은 편지를 가슴에 부여안고 짐승이 울부짖듯 처절하게, 그리고 미친 듯이 오열했다.
그 곁에서 묵묵히 서장의 내용을 함께 내려다보던 사내의 굵은 두 주먹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파르르 떨리며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사내는 피가 흐르는 자신의 거친 손바닥으로, 짐승처럼 울부짖는 여인의 좁은 어깨를 단단하고도 부서질 듯 꽉 감싸 안았다.
"마님, 더 이상 슬퍼하며 울지 마십시오. 나리께서 억울하게 피를 토하며 돌아가시면서까지 마님을 위해 남겨주신 이 피 묻은 복수의 검을, 이제는 우리가 서슬 퍼렇게 뽑아 들어 저 악귀들의 목을 칠 때입니다."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내의 굳건하고도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슬픔과 두려움으로 한없이 일렁이던 여인의 유약한 눈빛은, 점차 차갑고 날카로운 시퍼런 얼음송곳처럼 변해갔다. 더 이상 나약하게 울지 않으리라. 가문의 체면과 수절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자신을 말려 죽이고 남편을 독살한 그 끔찍하고 추악한 악귀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피눈물을 흘리며 원하던 그 생지옥을 오늘 아침 똑똑히 보여주리라. 어느새 헛간의 뚫린 지붕 사이로 붉은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피바람이 몰아칠 결전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씬6: 시댁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고 빼앗긴 재물을 되찾다
아침의 붉은 해가 거대한 저택의 기와지붕 위로 완전히 떠오르자마자, 안채의 널찍한 마당은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살벌하고도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 차올랐다. 시숙은 일찌감치 관아로 사람을 보내어 포졸들을 떼거지로 불러모으고, 평소 자신이 막대한 뒷돈을 쥐여주며 매수해 두었던 고을 사또까지 안마당의 상석으로 버젓이 모셔와 독기 어린 뱀 같은 눈으로 굳게 닫힌 헛간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밤새 차가운 광에 갇혀 피를 흘리며 죽어갔을 천한 머슴 놈과, 그 꼴을 보고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떨며 자신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살려달라 애원할 가련한 과부를 철저히 짓밟고 유린하여, 기어코 권리장전의 행방을 실토하게 만들 완벽한 심산이었다. 저택의 수많은 노비들과 아침 일찍 소식을 듣고 몰려온 탐욕스러운 친척들까지 마당에 빽빽하게 모여, 곧 벌어질 참혹한 구경거리에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여봐라! 당장 저 문을 부수고 끌어내라! 감히 주인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형수님을 겁탈하여 능욕하려 한 저 천하의 몹쓸 짐승만도 못한 놈을 당장 끌어내어 포박하고 무릎을 꿇려라!"
시숙의 의기양양한 호령과 함께 건장한 하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가 헛간의 낡은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쾅 하는 파열음과 함께 문이 열렸지만, 다음 순간, 마당에 모인 수십 명의 사람들 입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경악에 찬 탄성과 헉 하는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부서진 헛간 문을 밟고 당당하게 걸어 나온 것은, 밧줄에 묶인 채 질질 끌려 나오는 비참하고 끔찍한 머슴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3년 상을 치르느라 입고 있던 칙칙하고 무거운 하얀 소복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지고, 생전 남편이 가장 아끼며 지어주었던 눈이 시리도록 푸른빛의 최고급 화려한 비단 치마저고리를 눈부시게 차려입고, 머리에는 값비싼 옥비녀를 단정하고 기품 있게 꽂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바로 뒤를, 온몸에 붕대를 감고 피딱지가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든든한 호위무사처럼 압도적인 살기를 뿜어내는 사내가 바위처럼 묵직하게 뒤따르고 있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여인의 걸음걸이에는 단 한 치의 흔들림이나 망설임도 없었으며, 시숙을 향해 쏘아보는 그 형형한 눈빛은 하늘의 태양보다도 더 붉고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이 발칙하고 미친 년! 네 년이 기어이 단단히 미친 게로구나! 한밤중에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몸을 섞은 것도 모자라, 감히 상중에 시퍼런 색깔 있는 옷을 뻔뻔하게 처입고 사또 어른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다니! 당장 저 미친년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무릎을 꿇려라!"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여인의 당당한 태도에 시숙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하지만 포졸들이 다가가기도 전에, 여인은 품속에서 묵직한 쇠장식이 달린 흙투성이 철제 상자를 꺼내어 사또의 발치에 쿵 소리가 나도록 매섭게 내동댕이쳤다.
"사또 어른! 억울하게 피를 토하며 돌아가신 제 지아비의 원수를 갚고, 양반 가문의 탈을 쓴 채 인면수심의 짓을 저지른 저 악귀의 끔찍한 죄상을 천하에 고발하고자 하옵니다!"
쩌렁쩌렁하게 마당을 울려 퍼지는 여인의 단호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에, 방금 전까지 웅성거리던 마당은 일순간 찬물을 들이부은 듯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여인은 망설임 없이 철제 상자를 열어젖히고, 그 안에 들어있던 남편의 피 맺힌 유서와 비밀 뇌물 장부들을 사또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사또 어른께서 똑똑히 보시옵소서! 이곳에 적힌 두툼한 장부들은 저 간악하고 짐승만도 못한 시숙이, 지난 수년간 상단의 막대한 재산을 뒤로 횡령하고, 사또 어른의 윗선인 도관찰사 영감에게까지 수만 냥의 막대한 뇌물을 바치며 뒷배를 매수했던 끔찍한 치부책이옵니다! 그리고 이 밀랍이 찍힌 붉은 서신은… 제 가엾은 서방님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시기 직전, 시숙이 상단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매일 밤 자신의 탕약에 치명적인 독을 타서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정황과 증거를 낱낱이 기록해 둔 피 묻은 유서이옵니다!"
'독살'이라는 끔찍한 단어와, 무엇보다 자신의 목줄마저 날아갈 수 있는 '관찰사 뇌물'이라는 치명적인 단어에 상석에 앉아 있던 사또의 안색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사또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급히 유서와 치부책 장부를 펼쳐 들었다. 빽빽하게 적힌 종이 위를 바쁘게 오가던 사또의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는 공포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곳에는 어떤 변명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치밀한 시숙의 횡령 증거와,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살인의 정황이 죽은 자의 원한 서린 필체로 너무도 명백하게 적혀 있었다. 자신이 시숙에게 받았던 뇌물의 액수마저 적혀 있을까 두려워진 사또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모, 모함입니다! 사또 어른! 저 미친 과부년이 재산에 눈이 멀어 머슴놈과 짜고 헛것을 날조한 것입니다! 형님은 명백히 고뿔이 심해져 병으로 돌아가셨사옵니다! 저년의 거짓말에 속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시숙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짐승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여인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한 걸음 더 다가가, 시숙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서늘한 일갈을 내질렀다.
"네놈은 아직도 하늘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서방님께서 피를 토하며 돌아가시던 그날 밤, 네놈이 약탕기를 다급히 치우라 명했던 부엌데기 노비년이 그 약 찌꺼기의 냄새가 하도 수상하여 몰래 볕에 말려 항아리에 보관하고 있었음을, 내가 정녕 모를 줄 알았더냐? 사또 어른! 당장 저놈을 옥에 가두시고 이 집안의 부엌과 저 자의 처소를 샅샅이 수색하시어 맹독의 출처를 밝혀내시고, 저 장부에 기록된 횡령한 재물을 모두 몰수하여 국법의 지엄함을 보여주시옵소서!"
사태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사또는 더 이상 돈통이었던 시숙을 비호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여기서 시숙을 감쌌다가는 자신마저 관찰사 뇌물 수수와 살인 방조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고 귀양을 갈 것이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에, 사또는 재빨리 꼬리를 자르고 살기 위해 호통을 쳤다.
"여봐라! 당장 저 파렴치하고 짐승만도 못한 살인마 놈을 꽁꽁 포박하여 관아의 하옥에 가두어라! 그리고 놈의 수하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당장 이 집안의 모든 곳을 샅샅이 압수 수색하여 증거를 찾아내라!"
"사또! 사또 어른!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제가 사또 어른께 바친 은자가 얼만데! 저 미친년의 말을 믿으시면 아니 됩니다! 으아아악!"
포졸들에게 짐승처럼 짓밟히고 포박되어 질질 끌려가는 시숙의 비참하고 추악한 몰골을 내려다보며, 여인은 비로소 지난 3년간 자신의 숨통을 조여왔던 상복의 굴레와 가문의 체면이라는 이름의 끔찍한 감옥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녀의 곁에 묵묵히 서 있던 사내가 조용히 여인의 등 뒤로 한 걸음 다가와, 팽팽한 긴장이 풀려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크고 따뜻한 두 손으로 단단하게 감싸주었다. 마당에 모인 수많은 친척들과 노비들은 그 엄청난 기세에 짓눌려, 그 누구도 두 사람의 곁에 감히 다가가거나 손가락질하지 못했다. 그것은 지옥 끝에서 자신을 옭아매던 모든 것을 깨부수고 빼앗긴 권리를 되찾은 당당한 여주인과, 자신의 목숨을 던져 그녀를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낸 충직하고도 강인한 사내의 완벽하고도 눈부신 압도적 승리였다. 여인은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겨준 객주의 권리장전을 가슴에 소중히 꽉 품은 채,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준 사내를 올려다보며 길고 길었던 어둠을 걷어내는 참으로 환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씬7: 굴레를 벗고 혼인한 두사람, 거상으로 거듭난 새로운 삶
그 피비린내 나고 참혹했던 결전의 아침으로부터 어느덧 5년이라는 세월이 쏜살같이 강물처럼 흘렀다. 조선 팔도의 모든 돈과 사람, 그리고 진귀한 물건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한양의 가장 번화하고 시끌벅적한 운종가. 그 상권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가장 목이 좋은 중심에는 '명성상단'이라는 거대한 간판을 내건 조선 최고의 객주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온갖 진귀한 비단과 인삼, 도자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수십 척의 거대한 상선이 한강 나루터를 쉴 새 없이 오가며 막대한 억만금의 부를 축적하고 있는 이곳은, 이제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상단으로 그 드높은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수백 명의 상단 일꾼들을 호령하며 이 거대한 상단을 진두지휘하는 대행수는, 다름 아닌 5년 전 지방의 한 대저택에서 탐욕스러운 시댁의 끔찍한 음모를 가차 없이 박살 내고 당당히 자신의 권리와 목숨을 되찾았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돈이 오가는 시끄럽고 번잡한 앞쪽의 객각을 지나 상단의 안채 가장 깊숙한 곳,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화려하고 넓은 정원에는 흐드러지게 핀 모란꽃이 만개하여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위로 눈부시게 따스한 봄햇살이 황금빛으로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최고급 중국산 명주로 지은 화려한 비단옷을 기품 있게 차려입고 정자에서 여유롭게 쌍화차를 마시던 여인의 붉은 입가에 더없이 부드럽고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이제는 과거의 남루하고 찢어졌던 천한 머슴 옷을 완벽하게 벗어 던지고, 양반 못지않은 기품과 위엄이 흐르는 짙은 남색 비단 두루마기를 훌륭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탁자에 수북이 쌓인 장부들을 매의 눈으로 꼼꼼히 살피며 서 있었다.
"서방님, 밖의 날이 이리도 눈이 부시게 좋은데 그만 골치 아픈 장부를 덮어두시고 이리 와서 저와 달콤한 차나 한잔하시지요. 돈은 이미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벌지 않았습니까."
여인의 나지막하고 애교 섞인 부름에 사내가 붓을 내려놓고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과거 헛간에 매달려 피를 흘리던 우직하고 거칠기만 했던 투박한 머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 그의 얼굴에는 뛰어난 지략으로 상단을 굴리는 이지적이고 든든한 상단의 안주인, 아니 어엿하고 당당한 명성상단의 바깥양반으로서의 기태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5년 전, 시숙이 관아에 끌려가 국문을 받고 참수형을 당하여 가문이 풍비박산 난 직후, 여인은 남편의 유언대로 철제 상자 안의 모든 재산과 권리장전을 챙겨 미련 없이 그 끔찍하고 저주받은 저택에 불을 지르듯 떠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충직한 사내의 두 손을 굳게 잡고 한양으로 올라와, 하늘과 땅에 맹세하며 정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당연히 세상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양반가의 청상과부가 수절은커녕 상중에 하잘것없는 천한 머슴 놈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했다느니, 가문의 드높은 체면을 똥물에 구겼다느니 하는 세상의 온갖 더럽고 잔인한 손가락질과 악독한 뒷말이 시퍼런 비수처럼 그들의 등 뒤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하지만 지옥의 문턱에서 서로의 목숨을 구원했던 두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모진 비바람과 폭풍우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바위처럼 굳건하게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사내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여인의 곁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글공부와 셈꾼의 장사 일을 무섭게 배웠고, 여인은 남성 중심의 험난한 상도 세계에서 타고난 뛰어난 배포와 지략으로 사내를 든든하게 이끌며, 죽은 남편이 남겨준 상단을 불과 5년 만에 조선 최고의 규모로 엄청나게 키워냈던 것이다.
"어찌 감히 대행수 마님께서 친히 부르시는데, 이 미천한 서방이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분부대로 모시지요."
사내가 장난기 어린 능청스러운 말투로 대답하며 정자로 다가와 여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여인은 못 말린다는 듯 눈흘기듯 사내를 다정하게 흘겨보며, 가볍게 그의 넓고 따뜻한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직도 밖에서나 쓰는 그 얄미운 '마님' 소리입니까. 담장 밖의 상단 일꾼들이 듣는 귀가 많사온데 부디 가장으로서의 체통을 지키시지요, 바깥양반."
두 사람 사이에 티 없이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가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정원 구석구석으로 기분 좋게 흩어졌다. 사내는 찻잔을 내려놓고, 여인의 하얗고 고운 손을 깍지 껴 자신의 가슴에 대고 부서질 듯 꽉 마주 잡았다. 한때는 흙투성이에 거칠고 찢긴 상처투성이였던 두 사람의 두 손은, 이제 서로의 변함없는 사랑과 충만한 온기로 가득 채워져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의 깊고 그윽한 시선이 여인의 저고리 옷고름에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는 작고 반짝이는 장신구로 향했다. 그것은 5년 전, 시숙의 감시를 피해 숨이 멎을 듯한 찢어질 듯한 긴장감 속에서 빈방의 두루마기를 다급히 뜯어 기적처럼 찾아냈던 바로 그 '황금 열쇠'였다. 여인은 남편이 남겨준 그 열쇠를 돈으로 바꾸어 녹이지 않고, 당대 최고의 세공장이를 불러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노리개 장식으로 만들어 평생 자신의 가슴에 소중히 지니고 다녔다.
"가끔은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 끔찍했던 보름밤, 마님께서 이 황금 열쇠를 찾아내지 못하셨다면… 아니, 제가 담장을 넘어 불쑥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그 차갑고 캄캄한 헛간이나 무덤 속에 나란히 억울하게 누워 있었겠지요."
사내가 여인의 가슴에 달린 황금 열쇠를 조심스럽고도 애틋하게 매만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니요, 서방님. 제게 있어 이 차가운 금덩이 열쇠보다 천 배 만 배 더 소중하고 저를 살린 것은, 그 칠흑같이 어둡고 두려웠던 절망의 구덩이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제 손을 꽉 잡아주며 지켜주겠다 맹세했던… 바로 당신의 뜨거운 심장이었습니다."
여인이 사내의 넓고 든든한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살며시 기대며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과부의 수절이라는 숨 막히는 금기의 굴레, 하늘과 땅만큼이나 벌어져 있던 신분이라는 거대한 철벽, 그리고 탐욕스러운 이들의 살기 어린 음모와 생명의 위협. 그 모든 지옥 같은 역경을 두 사람의 힘으로 처절하게 깨부수고 기어이 쟁취해 낸 눈부신 사랑이기에, 두 사람이 함께 손을 맞잡고 마주 보는 지금 이 순간의 평화로운 햇살은 세상 그 어떤 황금보다도 찬란하고 벅차올랐다.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모란꽃의 짙은 향기가 두 사람의 길고 긴 험난했던 여정을 위로하고, 새롭게 펼쳐질 행복한 인생을 축복하듯 정원 가득 짙고 향기롭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돈과 권력에 미쳐 인면수심의 짓을 저지른 시댁의 악랄한 음모를 시원하게 박살 내고, 억만금의 재산과 진정한 사랑을 모두 쟁취한 두 사람! 금기를 깬 과부와 머슴의 짜릿하고 통쾌한 사이다 반격,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지옥 끝에서 거상으로 거듭난 부부의 완벽한 복수극에 가슴이 뻥 뚫리셨다면, 잊지 마시고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꾹 눌러주세요! 다음 시간에도 등골이 오싹하고 심장이 쫄깃해지는, 더욱 흥미진진한 전설의 고향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